필자 용인외고 유호재

그리스의 부도 사태가 현실화됨에 따라 이에 대한 책임 공방도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채권단과 급진좌파연합 양측 모두의 책임이라는데 입을 모으고 있다. 세계 주요 외신과 유명 경제학자들은 실패한 긴축 정책에 대한 채권단의 집착과 개혁 의지를 보여주지 못한 급진좌파연합(시리자) 정권의 정치적 무능이 현 상황의 원인이 되었으며 이것이 디폴트로 이어졌다는 의견을 밝히고 있다. 독자적 통화정책과 통화가치 절하를 통한 불황 탈출의 길이 원천 봉쇄된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체제의 근본적인 결함을 배경으로, 양 당사자들의 잘못이 사태 악화의 요인이 됐다는 평가다.

2010년 1차 그리스 구제금융 이후 최근 5년 동안 시행되어 온 채권단의 구제금융 정책은 그리스 경제를 회복시키고 채무 상환 능력을 키우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는 데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채권단들은 그리스에 혹독한 긴축을 강요했지만 그 결과, 오히려 수요 감소로 경제 불황을 심화시키고 실제 채무 부담은 오히려 늘어났다는 것이다.

구제금융 체제의 실패는 각종 경제지표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유럽통계청(유로스타트)과 그리스 통계청 등에 따르면 그리스 정부 지출은 2010년부터 작년까지 29.2% 급감했다. 이 기간에 정부 고용을 30%가량 줄이는 등의 초강력 구조조정을 거친 결과다. 결국 재정적자 규모는 급감했고 국가채무도 2011년에서 작년까지 약 11.0% 줄었다.

하지만 그리스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규모는 2011년 171.3%에서 작년 177.1%로 오히려 늘었다. 이는 혹독한 불황에 따른 GDP의 마이너스 성장으로 인해 그리스의 명목 GDP가 2010년부터 작년까지 24.6%나 크게 감소했기 때문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마틴 울프 수석경제논설위원은 칼럼에서 구제금융 이후 그리스 국민의 지출이 실제로는 40% 이상 감소했다고 추산하면서 그리스의 불황이 재앙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FT는 시리자가 그리스의 고질적인 정실주의·족벌체제 타파를 내세웠지만, 실제로 이에 맞서려는 의지는 거의 보여주지 못했고 개혁에서 끝없이 뒷걸음질 친다는 신호만 보냈다고 비판했다. 채무 경감 누락 등 아쉬운 점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을 마지막 구제금융으로 수용 가능한 수준이었으나, 시리자 정권은 이를 거부했다고 FT는 지적했다.

게다가 협상 막판 단계에서 치프라스 총리가 국민투표 카드를 빼든 것에 대해 최악의 선택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그리스 위기 정보사이트 ‘그릭크라이시스닷넷’(GreekCrisis.net)의 운영자인 아리스티데스 하치스 아테네대 법대 교수는 FT 기고문에서 국민투표 결정이 시리자 지지층을 만족시키고 그들의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기회주의적·근시안적 행동이라고 질타했다. 그는 시리자가 “망상과 광신이 뒤섞인 심리 상태에서 집단적으로 사고하고 결정한다”며 이런 낡아빠진 교조주의 분위기에서 외부 세계와 접촉 없이 그저 정당 요원으로 성장한 치프라스 총리가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렸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이와 관련해서 조지워싱턴대학의 정치학자 Henry Farrell은 Washington Post에 "그리스는 국민투표 이후 EU와의 합의 가능성이 낮아졌다. 그렇지만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그 합의는 더 유리한 합의일 것이다(원문:Greece is less likely to get a deal after the referendum, but will get a better deal if it does get one)" 와 같은 제목으로 흥미로운 의견을 기고해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협상 테이블에 올라온 그리스와 EU에게는 각각 수용할 수 있는 옵션들의 집합이 존재하는데, 그리스와 EU 쌍방의 옵션들의 교집합이 있다면 그것은 양측에 모두 이득이 되는 합의가 되는 것이다. 또한 이 교집합에 속하는 옵션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EU 혹은 그리스에 유리한 옵션과 덜 유리한 옵션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기존 그리스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 중에서 일부는 국민투표 이후로 선택할 수가 없게 되었고, 이에 따라 그리스의 옵션의 폭은 좁아지게 되었다. 만약 새로운 협상을 통해서 모두가 동의할 수 없는 합의를 이끌어 낸다면 그리스 입장에서는 그 이전에 가능한 교섭의 결과보다 더 좋은 옵션을 선택할 확률은 높아졌지만, 그리스와 EU가 함께 합의할 수 있는 옵션 자체가 줄어들어 상호이득이 되는 교섭의 집합도 줄어들었고 이에 따라 합의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을 위험이 커졌다는 것이다. 즉, 쌍방의 합의만 성사만 되면 더 좋은 교섭이 될 가능성이 높으나, 합의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그리스와 EU의 협상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우리 일상에서도 서로가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에서 서로가 더 유리한 입장을 고집함에 따라 화해와 협의가 빠르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서로가 서로의 입장을 내세우다 보면 양쪽 모두 유리한 선택을 하고자 하기 때문에 만약에 화해와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양측에게 더 좋은 합의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나, 아예 화해 자체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틀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스 부도 사태와 EU 협상 결렬을 보면서 우리 주변의 크고 작은 다툼과 화해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저작권자 © 경기시사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